내게 몇 가지 말썽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지. 어떤 건 앞에서. 어떤 건 뒤에서. 하지만 난 큰 배트를 사 왔어. 너도 알겠지만 난 이미 준비되었어. 이제 그 말썽들은 단단히 각오해야 할 거야 – Dr. Seuss
억압받아온 사람들의 전통은 우리가 사는 “비상사태”가 예외가 아니라 규칙임을 알려준다. 우리는 이 통찰에 부합하는 역사에 대한 개념에 도달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짜 비상사태를 초래하는 것이 우리의 과업임을 분명히 깨닫게 될 것이다. –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I
진짜 여성 같은 건 없다. 논리적으로 진실은 허위를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허위가 될 수 있는가? 어쩌면 이미 대답이 나왔을 수도 있다. 사라진 술어에 대한 논쟁도 끝났을 수도 있다 총과 칼, 불길이 우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서류는 경찰의 끄나풀처럼 우리의 기억을 조작할 것이다. 시선과 추파, 우리가 수감을 피하고, 강간과 구타, 죽음에 대비하는 수행하는 수많은 예방책과 공포가 거리의 우리들을 상기시킨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살아남기 위해 범죄에 발을 들이는 상황에서 민권이나 평화적인 시위에 대해 말하는 것은 요점에서 벗어난 일이다. 에더럴을 팔거나, 슈퍼에서 수프 캔을 도둑질하거나, 남자들에게 다리를 벌리는 일 같은 것 말이다. 심지어 우리 중 직업을 가진 이들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경우 삶이 더 비참해지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우리는 이미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대학에 갈 여유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가난한 동네에서 살아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 – 인식 운동에 실패한 이후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II
우리는 트레본 마틴(Trayvon Martin)도 아니고, 씨씨 맥도날드(CeCe McDonald)도 아니다. 우린 브레나 매닝(Breanna Manning)도 아니다. 나는 “우리가” 완벽히 하나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 차라리 우리가 공유하는 비슷한 상황들이 있다는 것이다. 사회보장번호나 은행 계좌, 이력서, 깨끗한 범죄 이력으로 우리 자신을 증명할 수 없는 한 우리의 삶과 신체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상황 말이다. 우리의 피부색이나 트랜스, 여성, 퀴어 여부만으로는 우리 자신을 증명하는데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공통의 정체성(여성, 라티노, 퀴어)으로 정의되는 우리들 모두는 같은 사람들이 아니다. 비록 그는 대마를 피운 것을 인정했지만, 오바마가 운전하다 알몸 수색을 당하거나 “약물의 의심”으로 총을 맞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우리들 사이의 차이가 후드티를 입은 오바마와 같은 옷을 입은 흑인 청소년 사이의 차이만큼 극단적이지 않더라도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 힘의 원천이 될 순 없다 – 여성들이 모두 본질적으로 혁명적이라는 주장이나, “우리는 모두 99%”라는 구호가 우리 간의 차이를 얼버무린다는 주장처럼 말이다. 우리 중 누군가는 사립학교 출신일 수도 있다. 다른 누군가는 하지마비 상태로 태어났을 수도 있다. 나는 강간 생존자일 수도 있다. 그들은 실업자일 수도 있고, 당신은 미등록이주민일 수도 있다. 그녀가 잠복 경찰일 수도 있고1, 그는 자기 사업을 소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공유되는 정체성을 모으는 것은 곧 우리를 범죄와 살인, 강간 가능성으로 간주하는 이름을 끊임없이 반복해 확인하는 것과 같다. 나는 이름 붙이기(naming)_가 다른 이들을 적법화(정상, 좋은)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를 부적합 화(비정상, 죽기 딱 좋은)하는 과정이라고 부른다2. 뉴욕의 유색인종 트랜스 여성이었던 로레나 에스칼레라(Lorena Escalera)가 두 고객의 방화에 의해 그녀의 아파트에서 살해당했을 때, 뉴욕 타임즈는 그녀의 _이국적인 성적 매력과 그녀의 “다채로운” 소유물을 묘사하고, “남자가 보기에도 그는 매력적이었다”라고 말한 이웃의 말을 인용하기 위해 그녀가 아닌 그녀의 정체성에 초점을 맞췄다. 그들은 그녀의 죽음이 비극이었고, 존경심을 가지고 그녀를 기억한다고 말하겠지만, 존중은 이렇게 하찮은 삶을 살아왔다는 이유로 나눠주는 것이 아니다. 대신 우린 무시당했고, 정치적으로 이용당했으며, 살해당했다.
진보주의자와 사회정의 운동가들은 이름 붙이기의 폭력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대신 우리가 모두 정상이라고 말하려고들 든다.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 스스로를 적법화하고 정상 시민 자격을 획득하려는 일은 다른 누군가는 불버이라는, 그 누군가는 정상 시민이 아니라는, 더 나아가 시민조차 아니라는 관점에 부역하게 된다.
또한 이름 붙이기는 우리의 속성과 정체성이 현실의 객관적 특성이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다양한 장치를 통해 생산되는지 설명한다. 우리가 상호작용하고 생각하고, 스스로, 혹은 서로를 판독하는 방식에는 사회와 완벽히 분리할 수 있는 본질 같은 건 없다. 성별이나 인종이 실재 한다든가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부정직한 일이다. 어쨌든 두 가지 점은 분명하다: 이 행성의 모든 개인이 거대하고 끔찍한 시스템의 영향 하에 있다는 것, 이를 제쳐 두더라도 그들이 신체를 통제하는 방식은 완벽히 임의적이라는 점이다.
연습삼아 여성이 근본적으로 어떤 것인지 설명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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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다양한 신체와 뇌, 호르몬, 염색체, 골격 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신은 결코 그녀의 신체에 대해선 언급해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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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퀴어 여성도 존재하기 때문에 당신은 결코 그녀가 남자에게 끌린다고 묘사해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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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결혼하지 않고, 집에 머물지 않는 여성도 존재하기 때문에 당신은 결코 그녀가 주부라고 묘사해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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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샐러드도 태워 먹고, 농구를 아주 잘하는 여성도 존재하기 때문에 그녀가 요리에 능하고 스포츠를 잘 못한다고 묘사해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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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여성”이라고 의미 지어지고 불리우는 다양한 역학에 근거한 것 외에는 당신은 결코 그녀를 여성이라고 묘사해선 안된다
어떠한 ‘이름’도 단어도 당신을 설명할 수 없게 된 지금, 당신은 무엇인가?
아무것도
전 세계가 당신을 이름 짓는데 집착할 정도로 독특해지는 것은 아무 쓸모 없는 일이다. 결국 수천 개의 형용사가 당신의 신체를 형용할 것이고 결국 그것들은 우리 자신이 될 것이다. 우리의 의학적 성별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그것일 뿐이다. 이름짓기는 끊임없이 탈출하고, 초과하고, 결핍되고, 자아를 망치는 것을 감수하기 위해 내려오는 잔인한 기표의 폭력이고, 위협이다. 중요한 건 지금의 합법적인 체계와 주관적인 운영은 단지 언어만이 아니라 권력의 방식에 따라 구성되고 집행된다는 것이다.
III
우리가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곳도 많고, 편안하게 여기는 곳도 많다. 우리는 밤에 남자들이 출입하는 바에 가지 않는다. 우린 괴롭힘 당하는 건 지긋지긋하니까. 우린 친구의 집에 언제나 욕설을 하는 친구의 친구가 머무를 때 그 친구의 집에 들르지 않으려 한다. 우린 대학 근처 동네로 가는 것도 두렵다. 그곳에 갈 때마다 우리 쪽으로 큰 소리로 고함치는 인종차별적인 욕설이 들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우리는 세계로부터 잠시간 휴식을 취할 수 있을 안전한 공간을 만들고 구축하려 할 것이다. 때론 위협을 느끼게 하는 사람들을 배제함으로서 이런 공간을 구축하기도 한다. 이는 대체로 어느 정도는 잘 작동할테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이름 붙이기를 하고 있고, 때문에 우리의 배제가 폭력을 수반한 여타의 배제와 다를 것이 없음을 인식해야만 한다.
여성의 공간은 이런 종류의 배제와 상호작용하는 측면에 있어서 특히나 유죄다. “페미니스트” 여성 공간과 올림픽은 모두 생물학적 구성을 기준으로 회원을 재거나 배제한다는 면에서 문제가 있다. 여성으로 여겨지지 않는 누군가가 여성의 화장실에 들어가 얻어 맞거나 체포될 때와 동일한 배제가 그 공간에서 벌어진다. 백인인지, 스트레이트인지, 시스인지 등 인적사항에 매치되지 않는 사람들을 명시하는 것으로는 배제를 해결할 수 없다. 특히 그들이 그 공간에서 여전히 타자화되어 있다면 말이다. 배제는 포함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제외하려는 영향력을 공격함으로서 해결할 수 있다. 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이 영향력은 거의 전적으로 우리의 통제 밖에 있다.
이 세계는 사회적 관계(이름 붙이기 등 권력의 방식들)의 총체이지만, 그 총계는 단지 전세계 수준의 추상적 합에 지나지 않는다. 이름 붙이기는 무수한 공간에서 국지적으로 발생한다. 공간은 계속 그들에게 영향을 주며 위력(power)으로 진화한다 이름짓기는 반복적으로 공간을 왜곡해3 억압의 체계를 만들고 유지한다. 공간이 특별히 크지 않다면, 그들은 계속해서 서로를 피흘리게 할 것이다. 우린 공간이 두려움, 행복, 분노, 흥분 등 우리에게 영향을 준다고 느낄 수 있다. 공간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항상 엄청난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호모라고 부르거나 그를 두들겨 패는 것은 모두 이름 붙이기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각각 그를 둘러싼 공간을 뒤틀리게 하고 공간, 그것의 연장선으로서 세계를 그와 다른 퀴어들에게 공포스런 장소로 만들게 된다. 야유와 비난은 다른 종류의 것이 아니다, 이들 사이에는 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둘 다 상대를 끌어내고 그의 소멸을 향해 밀어내는 위력의 표현이다.
위력은 단지 수행 능력, 행동을 초래하는 힘, 모든 상호작용의 동력일 뿐이다. 명백히 제한적이고 강압적인 방식의 위력이 있지만, 힘은 그 이상이다. 이름 붙이기는 위력이 작동하는 특별한 방식이지만, 이름 붙이기는 우리를 제한하고 위협하고 공격할 뿐 아니라 우리가 이 세계의 재생산을 위해 부역하게 만든다. 우리가 열광적으로 우리의 정체성에 관여할 때, 그것을 열심히 알리거나 생산할 때 – 더 나은 노동자, 더 나은 퀴어, 이민자 – 우리는 여전히 이름을 짓고 있다. 모든 것은 공간에 영향을 미치려는 위력의 행사이지만, 그렇다고 공간에 영향을 가한 모든 위력이 이름 붙이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이 혁명적인 것은 아니다.
위력은 이름 붙이기와 다른 끔찍한 짓에 국한되지 않는다. 위력은 우리의 생존 능력으로서 이웃을 품위있게 만들 수 있고, 이를 더 힘들게 만들 수도 있다. 우린 위력을 파괴하길 원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오히려 우린 힘(power)을 원한다. 우리는 생존을 위한 힘을 원한다. 우리는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 힘을 원한다. 인종주의자와 성차별주의자, 성별이분법주의자(heteronormativitive), 이성애주의자(cissexist), 자본주의자의 세상에 약간의 암시를 줄 수 있는 터무니 없는 것, 섹시한 것, 야만적인 것을 원한다. 우린 때때로 그 맛을 보았고, 지금 우리는 배가 고프다.
IV
“이 교리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마법이 행복에 대한 부름인 이유이다. 그 비밀스러운 이름은 창조물을 표현되지 않은 존재로 수복하는 몸짓이다. 마지막 사례에서 마법은 이름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이름으로부터 벗어나는 몸짓이다. 이것이 바로 아이가 비밀의 언어를 발명하지 않는 한 결코 더는 만족하지 않는 이유이다. 그의 슬픔은 마법의 이름에 대한 무지로부터 오는 것이 보다는 자신에게 부과된 이름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는 자신의 무능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가 성공하면, 새로운 이름을 발명하면 당장 그의 손에는 그에게 행복을 수여 할 통행증(laissez-passer)이 쥐어진다. 이름을 갖는다는 건 죄 짓는 일이다. 그리고 정의는 마법처럼 이름을 갖지 않는다. 행복한 무명의 창조물은 홀로 몸짓으로 말하는 마법사의 땅(the land of the magi)의 문을 두드린다”
조르주 아감벤, 신성모독(Profanations)
이름만 있는 마녀들이 있었다. 중세 봉건시대의 영주에 대한 봉기으로부터 카페에서의 퀴어 폭동, 노예제와 식민화에 대한 반란까지 우린 천년이 넘게 싸워왔다. 마녀들은 공간 사이와 한 가운데를 오가며 이웃을 돕고 왕과 국가의 권모술수에 저항할 그들의 비밀스런 능력을 사용했다. 모두가 마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마녀는 특별하고 특정한 정체성 내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마녀는 단순히 마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이고, 당신이 마법을 사용한다면 당신은 마녀이다. 누군가는 어느 정도만 마녀이거나, 너무 마녀일 수도 있고, 마녀가 되는 방법은 다양하다. 단 하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면 말이다.
V
“마법은 진정한 이름에 대한 지식”이라고 말들 하지만, 이건 이름 붙이기가 아니다. 마법은 이름 붙이기에 대한 지식으로서 이 세계를 비판하고 우리의 힘을 키울 이론과 실천이다. 진정한 이름은 이름 붙이기의 진실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젠트리피케이션을 가난한 이들에게 적대적인 것으로 인식한다. 우린 경찰을 이 적대적인 세계를 시행하고 보호하는 작자들로 인식한다. 우린 고속도로를 격리 장치로 이해한다. 우리의 투쟁과 경험을 위해 우리의 언어를 개발한다. 이 세계를 비판하고 실천하는 방법으로서 마법은 학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름 붙이기에 반대하는 공간에서 세계를 밀어내는 것이다.
마법과 이름 붙이기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대립하는 두 형태의 위력이다. 이름 붙이기가 이름 지어진 우리 자신을 만들어낸다면, 마법은 우리 자신을 되돌려놓는다. 직장에서 마녀같은 직원은 그 자신과 다른 이들을 위해 도둑질을 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한다면 그는 “좋은 직원이 아닐 것이고”, 그렇게 하지 않기로 한다면 그는 좋은 직원일 것이다. 이렇게 그는 서로 모순되는 정체성을 갖게 된다. 더불어 그는 그는 직장을 그와 힘과 자원을 가진 친구들이 있는 공간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다. 백인들은 순백의 시스템에 백인으로서가 아니라 이름짓기에 저항하는 것으로 그들 자신의 위치에 대해 적극적으로 저항할 수 있다. 우릴 이름 지음으로서 우린 이미 피해자이고, 곧 피해자가 될 사람들로 지시된다. 이름 붙이기를 공격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다른 방식으로 이름 짓는 것이 아니라 희생자가 되거나 희생자를 만들어내는 시스템에 저항하는 것이다.
마녀는 나쁘고, 마법은 사악하다. 마법은 넘쳐 흐르게 하고, 흐름에 저항하고, 실패하고, 모든 봉쇄를 깨는 무용한 위력(the power of nothing)이기 때문에 마법은 사악하다. 마법은 정당화에도 저항하고, 그에 관한 질문도 제쳐두고 세상의 모든 정상성을 공격하기 때문에 마법은 사악하다. 마법은 ‘선하지’ 않고, 그러려고 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사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이 여기서 무관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인생의 매 순간마다 가면을 쓰고 벗는다. 우린 이걸로 위장할 수도 있고, 우리에게 주어진 이름을 가지고 놀 수도 있다. 그들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란하고 숨기 위해서 아예 새로운 이름을 취할 수도 있다. 마법은 다른 정체성이 되거나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릴 식별하는 정체화에 적대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우릴 정체화하기 어렵게 만들거나 의미를 혼란스럽게 만듦으로써가 아니라 실제로 이름 붙이기와 싸우는 것으로 해낼 수 있다.
VI
이름 붙이기는 언어적 술책이 아니다. 우리가 거리에서 슬러(slurs)라고 불릴 때에도 그것에 슬러라는 이름을 짓는 것은 슬러 그 자체가 아니라 폭행의 위협이다. 이름 붙이기의 표면적인 언어적 술책을 살펴보는 일은 무척 쉬운 일이지만 단지 단어의 수준에서 그것에 반응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 이해한 것이다. 단순히 우리의 어휘에서 슬러(slur)를 제거하는 것으로는 그런 어휘를 만들고 유지하게 하는 힘에 저항할 수 없다. 우리가 인종주의적인 슬러를 말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으로도 그것이 인종주의적 시스템에 힘을 보태게 될 수 있으므로 우린 인종주의자일 수도 있다. 마법은 언어적이지 않다. 마법은 힘이다.
권력이 영향을 줄 수 있는 공간의 한 축인 공포에 대해 이야기해보자.이를 설명하기 위해 위협에 노출되어 있고 가해자들로부터 두들겨 맞게 될 퀴어 아이에게 되돌아가보자. 만약 가해자들이 하던대로 한다면 퀴엉 아이를 비롯한 다른 퀴어들은 공포를 느끼게 될 것이다. 만약 퀴어 아이가 반격한다면, 혹은 우리가 그 사건을 보고 개입한다면 우린 밤길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오히려 가해자들은 공포에 떨 것이다. 그들은 퀴어를 끝장내고 싶어하고, 마녀들은 퀴어를 해하는 자들을 끝장내고 싶어한다.
마녀들은 공간을 만들어지거나 파괴될 수 있는 지형을 가진 세계로 본다. 이름 붙이기 구조와 귄력을 증대시키는 책략의 법문화를 공격하는 것으로 마녀들은 창조하고, 뒤틀고, 구멍내는 것으로 공간을 그들의 것으로 다시 설계한다. 학교, 직장, 거리, 심지어 집까지도 우리의 몫이 아닌 세상에서 우린 이런 식으로 자신의 공간을 만들고 훔칠 수 있다.
우린 우릴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적대적인 공간을 만들 수도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마법이다. 우리의 이웃이 강간범들과 경찰에 의해 위협에 처할 때 누군가 우리의 거리에서 억압적인 슬러를 외칠 때 당신이 그들을 두들겨 패버릴 것이라는 것. 그것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 중 하나일 것이다.
VII
‘오컬트(occult)’라는 단어는 숨겨진, 누설되지 않은 것을 의미하는 라틴어 occultus에서 유래했다. ‘이소테릭(Esoteric)’은 그리스어에서 유래했으며, 내부자에 의해 유지되는 비밀을 의미한다. 마법은 가장 결코 누군가 알아선 안될 가까운 친구들과 공유하는 비밀이다. 물론 이것은 다른 이들이 마법에 입문하도록 도와선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단지 당신이 그들을 믿을 수 없는 한 머글들이 알게 해선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잘 해봐야 그들은 당신이 철없다고 말할 것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1999년, 2000년에 마리우스 메이슨(Marius Mason)은 밍크 모피 농장, GMO 연구소, 부동산 개발업체에 불을 질러 수백만 달러의 피해를 입혔다. 당시 그의 남편이었던 프랭크 암브로스(Frank Ambrose)는 밀고자로 돌아서 그에 반대되는 증언을 해 그가 22년 형을 선고받게 했을 뿐 아니라 환경 파괴 시설을 공격한 다른 이들에 대해서도 증언했다. 프랭크는 다른 이들을 배신했음에도 불구하고 9년형을 선고 받았다.
2008년 국제 퀴어 아나키스트 조직인 Bash Back!의 일부 회원은 악명높은 반 퀴어 대형 교회인 Mount Hope의 예배를 방해했다. 그들은 팜플렛을 뿌리고 그 회중의 퀴어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리기 위해 “게이어도 괜찮아, 걷어 차버려!(It’s Okay to be Gay! Bash Back!)” 배너를 걸었다. 또한 퀴어 커플들은 서로 애무를 했다. 그들의 활동은 합법적이었지만 Bash Back!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국적인 소송과 마녀 사냥을 촉발시켰다. 이 일은 수년 동안 계속 되었다.
세상을 공격하는 일은 위험하다. 마녀들은 두려움 때문에 공격을 피하진 않지만 그들의 활동이 잘못된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비밀로 유지하도록 조심한다.
마녀가 된다는 것은 세상이 당신을 불태우길 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범죄는 성직자들을 저주하고, 경찰과 싸우고, 은행을 털고, 대마를 피우거나 팔고, 동성애를 혐오하는 상점을 박살내고, 백인우월주의자들의 사무실을 부수고 회원들을 두들겨 패는 것이다. 우리는 유용한 기물과 지식을 습득하고 배포하는 방법을 찾는다. 낙태와 피임, 전동 공구, 음식, 빈 집, 무기, 치료제.
마법은 우리가 결코 가질 수 없었던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무력한 희생자로 이름 지어진 우리가 권력에 접근하게 되면 위협이자 표적이 된다. 마법은 금지된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권력을 훔치고 우리를 불리하게 만드는 위력을 공격하는 것이다. 이것은 범죄고, 방어이며, 공격이다. 마녀들은 밀고하지도 않고, 입싸물고 있지도 않는다!
VIII
수백 년 전 교회는 수천 명의 이단을 현세적 구세론(Immanentize the Eschaton)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투옥하고 처형했다. eschaton은 종말-마지막때이고 imanent은 ‘~으로부터 멀지 않은 것’, ‘~에 가까운 것’을 의미하는 “within”에 해당한다. 때문에 현세적 구세는 세상의 끝을 지금, 이곳에 불러오자는 것, 즉 이 땅 위에 천국을, 낙원을 만들자는 의미이다. 이 개념은 교회에 문제가 되었다. 교리에 따르면 신이 그 때를 가져올 때까지 알 수 없는 영겁의 시간을 기다려야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용법으로 사용하는 관련 개념으로 혁명이 있다. 역사는 일련의 단계를 거쳐 진행되어야 하고, 우리는 당을 세워야 하고, 때가 되면 혁명이 일어날 거고, 모든 것은 훌륭해질 것이다. 역사의 끝을 간절히 바라지만 지금 그것을 실현하고자 시도하는 것은 역효과만 초래할 것으로 간주된다. 대신 우리는 사제들과 교회에게 우리의 모든 에너지와 욕망을 갖다 바쳐야 한다.
마녀들은 발터 벤자민이 세계의 종말/역사의 종말에 대한 개념이 부정확하다고 말한 점에 동의한다. 우리는 세상이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취하는 모든 행동은 가능성으로 가득하다. 누가 무엇이 무엇을 촉발하게 될 지 알 수 있겠나? 그것이 당신이 되든, 내가 되든 우리가 할 일은 계속 시도하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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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하라, 어린 아나키스트들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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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붙이기가 어쩌다 한 번 일어나 우리에게 점착되는 일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름 붙이기는 이따금, 때로는 시간이 흐른 뒤에도 반복해 우리를 우리의 현재 위치에 고착시킨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위치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비난받던 누군가는 무고해지고, 혹은 역으로 비난하는 누군가가 될 수 있다. 이는 정체성 정치가 단순화와 한정된 추상화를 통해 어떻게 우리 삶의 경험을 설명하는 데 실패하는지, 그와 관련된 발언이 오직 점점 부정확해지는 일반화를 통해서만 가능해지는지에 대한 한 가지 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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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비유: 위력이 전력이라면 공간은 배터리가 아니라 배터리에 의해 충전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력의 흐름에 의해 공간은 극성을 띄고 친교와 그들이 아닌 다른 이와 그들의 신체에 대한 적대와 구축한다. ↩